차를 타고 그저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그런데 아지매 눈에 들어오는 한 건물이 있었지요.
교회인가? 은이성지? 뭐지? 호기심이 들었고, 들어가도 되나? 들어가 볼까? 했지요.
특히나 요즘은 코로나 시대이기에 어떤곳에 들어간다는것이 실례가 되기도 하다보니 조심스럽더군요.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그런 기분 참 오랫만이었어요.
고요하고 안정되고 따뜻하고 안정되고 평온한 기분
내려서 보니 은이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맨 처음 미사를 드린 성지였어요.
알짜 아지매는 태어나서 성당을 한번도 가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성당에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우연히 와 보게 될줄은 몰랐어요.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해서 성당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답니다.
자, 그럼 은이성지에 대해 좀 알아볼까요?
은이성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있는 천주교 수원교구 소속 성지입니다.
개설
은이[隱里]는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며, 천주교 박해 시기에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이다. 은이는 소년 시절 김대건이 신앙을 익히고 사제성소의 꿈을 키웠던 곳이다. 당시 숨어살던 교우들은 은이에서 사기를 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요지가 산재하여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맨 처음 미사를 드린 성지이다.
건립경위
1822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출생한 김대건과 가족들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1827년 골배마실과 은이성지에 생활 터전을 잡았다. 은이성지는 1836년 김대건이 모방 나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를 받은 장소이며, 사제가 되어 돌아온 후 최초로 사목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다.
이후 김대건은 은이성지를 중심으로 경기도 이천, 용인, 안성 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였다. 1961년 양지 본당의 5대 신부 정원진(루가)에 의해 김대건의 집터로 알려진 은이성지의 발굴이 진행되었고 돌절구와 각종 생활 도구가 발견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현황
골배마실에는 현재 김대건이 살던 집터가 양지 컨트리클럽 골프장 한쪽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의 석상과 제대, 초가집과 어머니 고씨의 모습을 새긴 부조(浮彫)가 남아 있다. 은이성지에는 각종 성물과 금가항(金家港) 성당이 있다. 전담 신부가 상주하고 있으며, 골배마실성지를 함께 관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은이성지 [隱里聖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615312&cid=51887&categoryId=53574
골배마실에는 김대건 신부의 집터와 그의 석상, 제대, 어머니 고씨의 모습을 새긴 부조가 남아있다네요.
조만간 그곳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골배마실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이며 2014년 8월 프란체스코 교황이 방문한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천주교 성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149687&cid=60111&categoryId=60133
이쯤에서 은이성지의 최초 신부이시자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에대해 궁금해졌어요.
김대건(金大建,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어린 시절 이름은 김재복(金再福)이었으며, 세례명으로 쓰일 때는 대건 안드레아로 한다.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 (기념일)은 7월 5일이다. 그의 세례명 안드레아는 아버지 김제준의 동생이자 순교자인, 김대건의 작은 아버지 김한현(김종한이라고도 함)의 세례명을 이어받았다
출생과 유년 시절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마을(송산리, 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김진후(비오) 이후 집안 대대로 천주교를 믿었다.
증조부 김진후는 본래 하급관리였다가 천주교 신자인 며느리의 모범적인 행실을 보고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하여 유배되었다가 1805년 해미읍성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배교한 잘못을 뉘우친 김진후는 해미읍성에서는 형리들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질 정도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으며, 충청도 해미읍성에서 10년 동안 옥살이 끝에 1814년에 옥사하였다.
김대건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김진후의 셋째 아들인 김한현도 1816년 대구감영에서 배교를 하지 않고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감옥에서 형님 김택현(김대건의 조부)에게 보낼 글을 쓸 기회를 얻자 "사람이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작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김대건의 부친인 김제준(이냐시오)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미리내 마을
이렇듯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조선정부의 극심한 박해를 피해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김대건은 7살 때까지 고향인 충청도 면천에서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산골인 골배마실로 피신하였다. 당시 용인 골배마실(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810)에는 박해를 피해 온 천주교회 신자들이 옹기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전하는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골배마실을 성지로 삼고 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인)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김대건은 1836년 청소년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은이성지를 방문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신학생으로 발탁되어[2] 한양에서 라틴어 등의 기초적인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계몽사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김대건》에 의하면, 모방 신부는 김대건의 집안 내력을 듣고는, 김대건을 천주교 신부로 키울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모방 신부 뿐만 아니라 정하상도 천주교 사제가 될 것을 권했다는 주장도 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실린 김재준의 공초(진술서)에 따르면, 평신도신학자인 정하상(바오로)는 김재준에게 "재복이(김대건의 아명,어린시절 이름)를 신학교에 보내시면, 훌륭한 성직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성직자가 되다
가톨릭 부제서품
김대건은 1844년 12월 가톨릭 부제서품을 받았다.
예수회 고틀랑 신부의 환대
연락을 받고 온 예수회(예수회에서 천주교 상하이 교구를 책임졌음)고틀랑 신부는 김대건 부제의 부탁으로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밤이 늦도록 정성껏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를 들었고, 천주교 신자들도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서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성사인 고해성사에 참여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한국말을 모르는 고틀랑 신부를 배려하여 통역을 했는데, 고틀랑 신부는 "신학을 마카오에서 공부했고, 조선에서 온 천주교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김대건 부제의 속깊음을 칭찬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쟈샹(金家港,금가항)성당(2001년 상하이 시에서 지방법원 부속건물을 짓기 위해 철거,한국 천주교회에서 은이성지에 진쟈상 성당을 복원했음. 가톨릭 신문에 의하면, 철거된 진쟈상 성당도 본래 성당이 있던 곳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다시 건축하였고,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기 위해 라파엘 호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경당을 지었음.)에서 세번째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같이 따라간 조선의 천주교 신자 12분, 선교사, 중국 천주교 신부 1분등이 서품을 축하했다. 특히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이 교회를 사랑하셔셔 조선 처음의 천주교 사제가 서품받았다"라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일주일 후인 8월 24일 상하이 진쟈상 성당에서 30킬로미터가 떨어진 상하이 횡당성당(상하이 예수회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천주교 미사를 드렸다. 상하이 예수회 고틀랑 신부가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1845년 7월 8일자 서한(9월 12일 추신을 적어 발송)에는 "… 그(김대건 신부)는 그의 첫 미사를 8월 24일 주일, 다블뤼 신부의 복사를 받으며 완담(즉 횡당) 신학교에서 드렸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가톨릭신문, 2015년 8월 23일, 박지순 기자)1845년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 항을 떠났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현재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2∼3일 정도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다.
즉, 김대건은 1845년 10월 조선에 도착하였다. 12월까지 한양과 경기도 일대에서 기해박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선교사들의 순교로 교회가 무력화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사목을 했으며, 남편과 사별한 후 박해를 피해 전전하던 어머니를 위로했다.
순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 김대건(金大建)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은 용인(龍仁)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 에 들어가서 양교(洋敎)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 헌종 9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洋舶)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銀錢)을 흩어서 경외(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의 제번의 말에 능통하므로, 천주교 신부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 한다.'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 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1801년, 순조 원년)의 사도 로 처형된 현계흠의 아들이다.
《헌종실록》 13권 12년(1846년) 음력 7월 25일 (무신) 1번째 기사, 《헌종실록》 헌종 대왕 행장
교세 확장 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외국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駐淸)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항로 개척이었다.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갈 수 있는데,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 이민식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 김대건,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8C%80%EA%B1%B4
역사 속에는 참으로 대단하신 분들이 많으신 듯 해요.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신념과 믿음이 어떻게 있었을까요.
아는것이 힘인건데 알아보고 갔더라면 조금 더 의미가 깊었을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녀와본 사진을 몇 장 남겨봅니다.
사진을 찍고보니 십자가 위로 빛이 묘하게 의미있어 보이네요.
김대건 기념관과 김가향 성당 내부는 코로나로 인해 개방되지 않았어요.
코로나가 좋아지면 반드시 다시 오리라 다짐했지요.
주차를 하고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렇게 기도드릴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요.
여러가지 색의 초가 준비되어 있고요, 큰초는 이천원, 작은초는 천원, 보이시는 초 봉헌금에 기도하실 초의 숫자만큼 헌금을 드리시고 촛불을 피워 기도하시면 됩니다.
아지매 가족도 촛불 기도를 드렸어요. 처음 해보는거라 멋적기도 했는데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이가 가족 초를 하나하나 불을 붙이는데 기분이 참 설명할 수 없었답니다.
아지매와 남편 첫찌와 둘찌 우리가족이 좋아하는 핑크색 초로 불을 붙이고 앉아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왜그렇게 눈물이 흐르던지요. 글을 적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맺혔네요.
나중에 물어보니 남편이와 아지매가 한 기도가 정말 똑같았어요. 어쩜.^^
저희의 기도를 들으셨을까요? 들어 주실까요?
이 모든 촛불의 기도가 이뤄지기를....
은이성지 안내문이 있어요. 어떤곳인지 모르고 갔던지라 열심히 읽었지요.
세례를 받는 모습의 모형인듯해요. 알수 없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라구요.
입구에 엄청 큰 나무가 있어요.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지요. 날씨가 무덥지 않았다면 잠시 앉아 넋을 놓아보고 싶은 공간이었답니다.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면 한번 다시 방문해서 넋을 놓아보려 합니다.
성지 안에는 듬성듬성 큰 나무들이 자리잡고 있어요. 그냥 나무일뿐이데 왜 보고 있으니 의지가 되던지 그것 또한 알 수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장마기간이었는데도 이날은 하늘이 정말 너무너무 맑았어요. 이런 하늘 한장 찍어둬야 겠지요?
누군가가 아지매를 반기는 듯한 기분이 들게했던 하늘이었습니다.
주의사항이 적힌 표지판이예요. 참고하시고 방문해 주시고 경건한 마음과 경건한 복장으로 경건하게 다녀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잠시 은이성지를 함께 느껴보실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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